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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정부를 대신한 최고의 관청, 비변사 터

by 가람풍경 2025.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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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비변사는 조선 중기와 후기에 걸쳐 의정부를 대신한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빈번한 왜구와 여진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 관련 일을 처리하는 임시기구로 출발했지만, 의정부와 병조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그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상설 협의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임시 군사대책기관에서 정책결정기구로까지 그 성격이 변모했으며, 점점 의정부를 대신하며 국정 전반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권력이 집중되면 문제가 생기는 법!
의정부와 6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행정체계의 문란, 왕권의 상대적 약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1865년(고종 2)에 폐지되었습니다.

 

종로 청덕궁 돈화문 앞,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앞에 조선시대를 호령했던 비변사 터가 있습니다.

 

비변사 터였던 현재의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서울우리서울박물관은 농사를 지으면서 혹은 집안일을 하거나 경사가 있을 때 노래하며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녹아내렸던 우리의 소리에 대한 걸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는 국내 첫 민요 전문 박물관입니다.

우리나라 139개 시군, 904개의 마을 곳곳을 찾아 일노래, 의례요, 놀이노래 등 일상생활에서 부르고 즐기던 수많은 민요들을 수집했고,  MBC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전국 900여개 마을에서 직접 채록한 18,000여 곡모아 들려주는 박물관입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서울우리소리박물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조선 국가 최고의 관아였던 의정부는 왜 비변사에 밀렸을까요?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가져와 도평의사사를 두고 문화부, 삼사, 중추원 등의 종2품 관원들이 모여 국가의 중대한 일을 의논했습니다.

 

정종 2년(1400)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며 왕권과 의정부와 육조,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습니다.
즉, 의정부가 정책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육조가 행정 실무를 집행하고, 삼사가 권력 행사에 견제 작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러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의정부의 3의정(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포함하는 원상(임금이 정상적인 정치를 할 수 없을 때 이를 대리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던 원로 재상)과 병조 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방략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이라고 불렀습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변칙적이며 편의적으로 유지해 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합의체제를 고쳐 임시적으로 비변사라는 비상시국에 대비하는 기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창덕궁 돈의문 앞 비변사 터 모습

 

 

1517년에는 여진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사를 설치, 이를 곧 비변사로 개칭하였고 1520년에 폐사군 지방에 여진이 칩입하자 다시 비변사를 설치하는 등 주로 외침을 당해 정토군을 편성할 때 비변사가 임시로 설치되곤 했습니다.


1522년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의 방어 대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의정부와 병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에게 보고하게 되기 시작했고, 1554년(명종 9) 후반부터 을묘왜변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합의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변사는 변방의 군사 문제를 주획하는 관청으로 의정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해 비변사를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활용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며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습니다.

인조 때에 이르러 서인정권은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비변사는 정책결정 기구로 그 성격이 변모했고, 의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비변사 기능의 확대는 의정부와 육조를 주축으로 하는 국가 행정체제를 문란하게 했고, 국방력의 강화와 사회 혼란의 타개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왕권의 상대적 약화를 가져왔다고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비변사는 종전대로 외교, 국방, 치안 관계만을 관장하고, 나머지 사무는 모두 의정부에 넘기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격하시켰고 이듬해에는 그 업무를 의정부에 이관하며 비변사의 막강한 권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리 내용)

 

 

흔히 비변사는 세도정치기의 변질된 용도로만 배우는 기구이다 보니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뺏은 비정상적 기구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한데, 사실 비변사가 처음 상설화될 때만 해도 비변사의 기능은 소수의 고위 관료들이 모여 합의와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효율적으로 국정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비변사는 조선 중기부터 사회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처한다는 측면과 공론을 수렴한다는 측면, 그리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측면 모두 잡을 수 있는 기구로서 활용된 반면 정치적 균형이 한쪽으로 확 쏠리다가 흥선대원군의 세도정치에서 개혁의 일순위가 되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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