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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목릉

by 가람풍경 2026.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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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은 서울 동쪽에 있는 9기의 조선왕릉(15개의 봉분)이라는 의미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에 잠들어 있어 조선왕릉이 제일 많은 곳입니다.
아울러 원이나 묘가 아닌 왕릉만 있는 곳이 바로 동구릉이기도 합니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현종의 숭릉, 장렬왕후의 휘릉, 단의왕후의 혜릉, 영조의 원릉, 헌종의 경릉이 차례로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능의 개수에 따라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55년(철종 6) 추촌 문조(효령세자)의 수릉이  이곳에 옮겨지면서 동구릉이 완성되었습니다.

 

[조선왕릉] 조선왕릉이 가장 많은 구리 동구릉(입장료 및 주차장 정보)

 

오늘은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와 그의 첫 번째 비인 의인왕후, 두 번째 비인 인목왕후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 목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건원릉에서 동쪽 숲길을 걸어가면 동구릉 목릉이 있습니다.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의 동원이강릉(동원삼강릉)입니다.

 

동구릉 가장 깊숙이 있는 왕릉이라 목릉으로 들어가는 숲길은 울창한 소나무와 참나무가 장관을 이룹니다.

 

 

 

목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안쪽 깊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조선 왕릉을 통틀어 구조가 가장 독특하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목릉은 동원삼강릉으로 넓은 부지를 자랑합니다.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기적적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최초의 방계출신(직계가 아닌 옆 갈래 혈통) 왕입니다.

이후 방계출신 왕으로는 인조와 철종, 고종 등이 있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일본으로부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번의 침략을 당하며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겼었고,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며 민심을 크게 잃었던 왕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황과 이이, 류성룡 등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고,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등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장수들이 등용되던 때이기도 한데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나 아들인 광해군의 명성을 극도로 질투하며 왕권 방어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동구릉 목릉 홍살문

 

홍살문은 능이나 원, 묘, 궁 등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으로,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웠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홍살문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니 격식이나 예절을 갖추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의인왕후 박씨(1554~1600)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선조와의 사이에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품이 매우 부드럽고 자애로워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했던 덕이 높은 왕비였다고 전해지는데요.

후궁 공빈 김씨가 낳은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세자로 책봉되는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고초를 겪었고, 몸이 약한 나머지 전쟁이 끝난 1600년에 정릉동 행궁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목릉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이 아닌 한 번 꺾어져 정자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 자연을 그대로 두기 위한 조치로 해석됩니다.

 

 

인목왕후 김씨(1584~1632)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2년(선조 35)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선조 사후 광해군과 대립하여 서궁(덕수궁)에 갇혀 지내다가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19세에 51세의 선조와 혼인해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세자였던 광해군과 지지세력에게 엄청난 위협이었습니다.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는 사형당했고, 유일한 피붙이였던 영창대군도 8세의 나이에 강화도 유배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목왕후 본인도 대비의 자격을 박탈당한채 경운궁(덕수궁) 석어당에 갇혀 지내는 유폐생활을 하는 등 조선 왕실 최고의 비극적 여인이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마침내 서궁 유폐에서 풀려나 대비로 복권되었고, 163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와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의 능좌측에 50m 정도 떨어져 이웃하여 있고,  두 번째 왕비인 인목왕후의 능우측에 홀로 떨어져 있어 두 언덕에 3개의 능이 있는 동원이강릉(동원삼강릉) 형식입니다.

 

 

목릉 자리는 1600년에 건원릉 동쪽에 의인왕후의 유릉으로 조성되었습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건원릉 서쪽에 산릉을 조성했으나 병풍석이 무너지자 1630년에 유릉의 서남쪽으로 이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역을 합하여 목릉이라 불렀고 163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능침 동남쪽에 안장되어 동원삼강릉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가운데 자리한 의인왕후의 능이 선조의 능보다 앞으로 조금 더 튀어나와 있어, 정자각에서는 의인왕후의 능이 가장 잘 보입니다.

 

왼쪽에는 수라청이, 오른쪽엔 수복방이 있습니다.

수라청은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원을 지키는 사람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선조의 두 번째 계비인 인목왕후의 능

 

 

목릉은 임진왜란(1592년)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겪은 직후에 만들어진 능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장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일본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정교하고 화려한 석물들에 비해 목릉의 석물들은 다소 투박하고 거대하며 해학적인 형태를 띤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석조 미술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적 증거물인 셈입니다.

 

선조와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의 능

 

목릉의 정자각(보물)

 

정자각은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모시던 곳으로, 위에서 봤을 때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제향음식을 차려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진 전각입니다.

 

1608년에 세워진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목릉 정자각은 1408년에 세워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정자각과 1674년에 세워진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정자각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있던(현 헌종의 경릉) 선조의 목릉이 1630년(인조 8)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온 것입니다.

 

목릉 정자각은 남아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 형식으로 지어진 정자각입니다.

다포형식이란 기둥 위쪽 이외의 기둥 사이에도 공포(짧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어놓은 것)를 배열한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목릉 정자각에서 바라본 진입로 모습

부지가 넓어 수라청과 수목방도 널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목릉 정자각 제향공간

 

목릉의 기신제는 매년 3월 16일입니다.

 

목릉의 비각

 

목릉 비문

 

왕릉의 비각에는 왕과 왕비의 생애, 시호, 업적, 능의 조성 기록 등이 새겨진 비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이겨내야 했던 선조, 자식 없이 외롭게 전쟁터를 돌았던 의인왕후, 그리고 자식을 잃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인목왕후까지.
살아서는 단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격동의 주인공들이었지만, 지금은 구리 동구릉의 가장 깊고 아늑한 숲 속에서 세 개의 언덕을 이루어 서로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릉선조왕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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