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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앞,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터

by 가람풍경 2025.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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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맞은 덕수궁 돌담길은 전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걷기 좋은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추석 연휴엔 아직 단풍이 물들지 않았으나, 지금은 단풍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서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입니다.

 

가을의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서울시청 서소무청사 앞에 있는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터 표지석을 봤습니다.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1574~1656)이 태어난 곳입니다.
근처에는 퇴계 이황의 집터 표지석도 있습니다.

 

마침 인터넷에 한길타임스의 '[서울시 구석구석 219] 김장생, 김집선생 생가터'라는 기사가 있어 조선시대 김장생과 김집 선생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 이를 기반으로 두 선생의 일생을 살펴봤습니다.

 

숭유배불, 즉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치, 문화, 사상의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성리학의 큰 흐름은 퇴계 이황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 두 줄기로 대별되었죠.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김장생은 그 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던 구봉 송익필(1534~1599)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습니다.
그의 성리학은 이이의 학문세계와 맥을 같이하여 기호학파에 속했고, 특히 성리학의 중추를 이루는 예학의 깊이가 깊어 예학의 태두로 칭송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김집은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 추앙받았는데요. 
사후에 해동 18현으로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인물입니다.

 

김장생(1548~1631)은 조선 예학의 기틀을 세운 대학자입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이자 예학(禮學) 연구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자는 희원, 호는 사계입니다. 
관직 생활을 한편으로 하면서도 학문과 강학에 많은 힘을 쏟았고,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과 같은 격동기 속에서 학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특히 예와 상례, 가례 등 의례에 관한 저술과 강학으로 유명하여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 실무적이면서도 학술적인 저작을 남겼습니다. 
김장생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요.
송시열과 송준길 등 후대 기호학파의 맥을 잇는 인물들이 그의 학통을 계승해 조선 후기 성리학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만년에 낙향해 후진을 양성하며 예학을 체계화했고, 인조반정 이후 산림으로서 정국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사후 문원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의 학문과 교육 방식은 기호학파 형성의 기반으로 평가됩니다.

 

 

김집(1574–1656)은 김장생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 기호학파 완성에 기여한 학자입니다.


김집은 김장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자 사강, 호 신독재)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예학을 더 깊이 연구하고 체계화한 인물입니다. 
광해군대의 혼란으로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인조반정 이후 활동을 재개했고, 관직에서는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나 학문과 강학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의 학문을 정리하고 확장하여 예학의 체계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송시열 등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기호학파의 형성과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글과 강론은 일상생활에서 예를 실천하는 데 방점을 두었고, 학문적 엄격성·실천적 규범을 강조한 점이 특징입니다.
김집의 학풍은 이후 서인의 학문적 근거로 작용했으며, 그의 묘·서원에는 후학들이 그를 기리는 흔적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예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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